▲ 한일수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두리한의원장 |
불과 몇 년 전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중간고사 성적이 나쁘단 이유로 단체로 엎드려 뻗쳐한 채 몽둥이찜질을 당하던 우리(나)였다. 그런 무차별적이고 글러먹은 폭력과 불의에 우리는 제법 빠르게 익숙해졌다. 그래서 주체적 사고랄지 자발적 참여 등은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자에게 그런 자발적 헌신과 겸손,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가득한 시민운동은 정말로 놀랍고 새로운 세계였다. 많은 노력 끝에 용산미군기지는 결국 대전으로 오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고, 시민이 뭉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이 조그맣게 싹을 틔웠다.
3일 서울시장 범야권 단일후보로 박원순 후보가 선출됐다. 가히 일대 사회적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안철수 출마 시사 이후로 박원순 후보 선출까지 불과 한 달 안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수많은 분석과 풀이가 쏟아지고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우려는 유권자들에게 정당정치가 거부당하는 현실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공화국을 다스리기 위해 대의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자를 뽑아 나라 살림을 맡기는 대의민주주의는 사실 정당정치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람을 심판하는 것보다 정당의 정책과 실천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더 항구적이고 책임 있는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민주당 입당 가능성도 열어두고는 있다지만 박원순 후보는 사실 따지자면 개인 자격이다. 시민 후보란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그 자신의 양심과 양식뿐이다. 자신의 신념에 비쳐볼 때 옳다고 모두가 반대하는 어떤 정책(예컨대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막을 것인가. 정당정치는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여러 가지 우려와 근심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범야권 후보로 박원순 후보가 선출된 것에 대해 걱정 대신 희망과 기쁨을 보낸다. 필자 자신이 시민운동진영의 한 사람으로 자화자찬 같아서 매우 쑥스럽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시민운동단체가 해온 일들은 낮은 곳을 비추고 억눌린 자를 북돋우며 세상이 좀 더 공평해지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그것을 다른 말로하면 나만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묵묵히 일해 온 시민운동 실무자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박원순 후보는 이런 시민운동 실무자로서 20여 년 간 살아왔고 그 일을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정치 경험도 없고 그가 해온 시민운동단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거대한 서울시 행정조직을 잘 끌어나갈지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와 맞서서 시민후보로서의 역량을 잘 발휘하기 바란다. 역시 훌륭한 후보인 나경원과 박원순의 멋진 대결이 어쩌면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사적인 순간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기업은 이류고 정치는 사류라는 야유를, 그런 야유를 보낼 위치가 아닌 자 입에서 듣고 있는 우리 정치가, 과거보다 나아지길 바라지 않는 국민은 없다.
시민운동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조롱을 더 이상 감수해서도 안 될 것이다. 시민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하는 시민단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힘겨운 재정과 넘치는 일거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진정성과 헌신으로 노력해주길 바란다. 박원순 후보는 시민운동가다운 염결한 태도를 견지하되, 갈등과 대립을 현명함과 따듯함으로 해결해 나가는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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