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우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
전기는 현대문명을 지탱하는 인체의 혈관과 같은 기본 동력원이다. 전기가 없으면 어떤 문명의 이기(利器)도 작동되지 않는다. 죽는다는 말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그날 불의의 정전을 겪었던 162만 가구에게 적어도 30분 동안은 나라가 망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말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번의 정전사고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16일자 언론보도에 따르면, 늦더위가 예고되었지만 한국전력공사가 전력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요 발전시설의 정비에 들어갔기 때문에 국가 비상사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 한다. 아울러 예비전력이 안정수준 밑으로 떨어져 300만에 이르자 '예비전력이 100만 미만으로 떨어졌을 경우 전력공급을 강제적으로 차단한다'는 매뉴얼을 무시한 채 황급히 순환정전이라는 비상조치를 취한 잘못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17일자 신문에서는 국민들의 에너지 소비행태와 의식, 우리 사회의 매뉴얼 무시 관행이 잘못되었음을 보도하는 한편, 단전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한국전력공사를 찾아가 책상을 치며 질책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22일자에서는 모 야당 의원의 주장이라는 전제하에 15일의 단전사고 때 예비전력이 지식경제부의 발표처럼 24만가 아니라 블랙아웃(Black out) 상황이 벌어지는 제로(0)까지 떨어졌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16일자 보도에서 매뉴얼도 무시한 채 황급하게 순환정전이라는 비상조치를 취한 것도 이런 까닭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24일자에서는 15일의 대정전 사고 때 전력거래소 이사장, 지식경제부 장관, 한국전력 사장 등 전력 관련업무의 수뇌부 3명이 사고의 지휘현장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번의 정전사고 이후의 과정을 보면, 사고의 발단에서부터 사후대책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선생의 기해봉사(己亥封事)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4만여 자에 달하는 상소문에서 초려는 왜호(倭胡) 양란(兩亂) 이후 피폐해진 당시 조선사회를 '나라는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有國無之)'라고 진단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획기적인 개혁의 방책을 제시한 바 있다. 정풍속(正風俗), 양인재(養人材), 혁구폐(革舊弊)가 초려 개혁안의 핵심이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자. 한국전력공사는 5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도 변명에 급급할 뿐이다. 여론이나 정책 당국자, 국회 등에서도 책임을 추궁하거나 뒤늦게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지만 사안의 핵심을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한국전력공사를 찾아가 책상을 치며 질책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는데, 대통령이 분노가 아닌 통치행위의 형태로 이번 사고의 책임을 추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라는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은 같으나 그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는 판이하게 다르다. 초려 선생은 개혁이 일시적인 대증요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통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낡은 폐단을 고치는 일도 시급하지만 그와 동시에 풍속을 바로잡는 일과 제대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 등 완급을 고려한 근원적인 처방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근본과 지엽말단이 있는 법이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이후 책임을 회피, 전가하거나 추궁하는 움직임은 많아도 근본적인 대책을 꼭 짚어내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초려가 만언봉사(萬言奉事)에서 국정 개혁의 골자로 논한 '정풍속'과 '양인재'는 바로 교육이다. 국가나 사회의 어떤 개혁에 있어서도 교육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교육을 통한 개혁이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 근원적인 대책인 교육을 통해 국민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빈발하는 '간장이 얼고 소금이 시는' 그런 일이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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