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충남대에서 열린 '비래사 문물의 전통적 재조명' 불교문화학술회의에서 충남대 사재동 명예교수가 비래사(飛來寺)가 백제시대 호국원찰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
지난 24일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불교문화학회와 중앙인문연구원 주최 '비래사 문물의 전통적 재조명' 불교문화학술회의에서 충남대 사재동 명예교수는 “백제의 연기 주류성 배후의 비암사처럼 비래사도 대전 외곽산성의 성채를 관장하는 호국원찰로 계족산의 법천사·봉주사·비래사, 식장산의 고산사·봉서사, 보문산의 보문사 등이 창건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호국원찰로서 비래사의 기반과 요건에 대해 사 교수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에 자리한 비래사는 백제의 웅진도읍 시절 대전은 왕도를 지키는 제1의 전초기지였다”면서 “동성왕과 무령왕을 정점으로 백제왕들이 대전의 외곽 산악지대인 계족산·식장산·보문산 등에 성채를 쌓고 막강한 군대를 배치해 국방에 만전을 기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계족산성을 비롯해 질현성·능성·갈현성·삼정산성·노고산성·보문산성·사정산성 등 40여개 산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백제 군사들의 호국정신과 승전사명을 고취하기 위해 산성 주변에 사찰 건립이 필요했는데 비래사는 계족산 삼봉 가운데 응봉산이 암석줄기로 우뚝 솟은 사자암 석굴 옆에 비래천이 항시 청정수를 내려 보내고 있어 계족산의 주성 계족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게 사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또 “불교사적으로도 비래사는 백제시대 웅진 수도권에 자리해 백제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라 통일기나 고려시대 불교의 관할을 받으며 조선시대에는 배불·억불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사 교수는 그러나 “백제시대 호국원찰로 창건된 천년고찰 비래사는 신라시대에는 계족산문 기도도량으로, 고려시대에는 백월산문 수도도량으로, 조선시대에는 유·불소통 융합도량으로서 근현대적 중흥도량으로 신축되기까지 유지 전개돼 면면한 전통을 이뤄왔다”고 의미를 담았다.
사 교수의 이런 주장에 대해 한남대 한기범 교수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이뤘던 회덕은 국방차원에서 관방시설(山城)이 발달했으며 그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보급의 거점, 또는 불교식 원당(願堂)으로서의 사암(寺庵)이나 사찰이 산성 가까이에 상당수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조선중기 비래암고사기(飛來庵故事記)에는 '고을의 은진송씨 문중 사람들과 승려 학조대사가 협력해 비래암을 중창했다'고 했고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들에서는 비래암 기사들 외에 '불우(佛宇)'조에 '비래사(飛來寺)'가 따로 수록되기도 해 문헌상으로는 조선중엽까지 그 역사성이 확인되고 있다”면서 “비래사의 역사를 문헌자료 이상으로 소급해볼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 사 교수의 주장은 특히 주목해야할 시각”이라고 말했다.
임연희 기자 lyh3056@<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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