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두리한의원장 |
남자는 여자에 비해 상대방과 대화하기가 어렵다. 미국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 남성과 여성을 편 갈라놓고 '대화'를 주제로 토론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자들은 얼마 안 가서 온갖 취미 이야기와 세상사를 가지고 대화를 하는데 남자는 한참을 쭈뼛대더니 다트 게임과 같은 게임을 하고 나서야 대화를 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들은 서열이 정해지고 나서야 대화가 가능한 존재란 말이다.
수탉 세계에는 쪼는 순서(peking order)란 게 있다. 장 닭이 모이를 쪼아 먹고 나서야 다른 순위의 닭들이 모이를 쫀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사정없이 장닭의 쪼임질을 당하게 마련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이 페킹 오더(pecking order)에 대단히 민감하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부터 상대방에게 말을 높일 것인가, 평교를 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내심 내가 더 높아 보이는데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지 않으면 고얀 놈 딱지를 붙이곤 상대하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막역지우나 망년지교가 존재하기 힘들다. 여섯 살 꼬마에게 내 친구라고 부르는 할아버지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순서와 우열에 목매는 남자들이 자매애를 타고 나는 여성들의 친화력을 이해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도, 남자를 사이에 두고 대립할 때나 성립하는 말이지,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있을 때 잘 뭉치고 잘 지낸다.
남자들이 소통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어릴 적부터의 교육도 한 몫 한다. 요즘은 안 그러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사내 녀석이 부엌에 얼씬거리면 가랑이 사이에 달랑거리는 물건 떨어지게 어딜 기웃 거리냐는 지청구를 얻어듣기 십상이었다. 덕분에 나는 요리하는 즐거움을 서른 넘어서야 조금 알았다. 원통한 일이다.
그 뿐인가?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라는 거다. 태어날 때 울고 아버지 돌아가시면 울고 나라가 망했을 때 울어야 남자란다. 그렇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남자는 보통 인생에서 두 번 울 일 밖에 없는 것 아닌가. 기쁠 때나 감격했을 때, 슬플 때 혹은 두려울 때 등 감정과 신체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표현의 수단이 눈물인데 울음과 분노, 회한, 슬픔을 그저 속으로 삭여야 한다. 이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그 스트레스를 제대로 받아 화병에 풍병 날까 걱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 남자들 자살률과 심혈관질환 발병률은 세계 제일이다.
얼마 전 서울시장이 네 번을 울었다고 한다. 뉴스에서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배운 대로 “사내 녀석이…”라며 혀끌탕을 치지는 않았다. 그이의 곡진한 사연과 뜨거운 충정과 냉철한 철학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생 세 번 울라는 대한민국 남자가, 그것도 서울시장이란 막중한 위치에 있는 그가, 만천하에 대놓고 보란 듯이 눈시울을 훔치는 모습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울기 전에 말로 해보지라고 말이다.
오세훈 시장의 선택에 내 판단을 더하는 것은 이 글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저 뒤늦게라도 눈물을 통해 소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위로 따지면 6조의 판서와 동급이었던 2011년 한성판윤 오세훈 시장이 서울시민을 향해 던지는 저 뜨거운 소통의 눈물 앞에서 나는 왜 피식 헛웃음만 나오는 걸까. 그건 내가 영화를 보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친구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도 눈물이 핑 도는 덜 떨어진 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울보이긴 하지만 나라면, 남들 앞에서 채신머리없이 울기 전에 사람들과 말로 먼저 풀어보려고 노력해보겠다.
남자는 세 번만 울면 안 된다. 의료 전문가로 단언컨대, 병나서 죽는다. 울기는 자로 하되, 남들 앞에서 울기 전에 먼저 말로 풀어보자. 대화가 먼저고 눈물은 나중에 보이는 게 순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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