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갑동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역사를 전공하면서 글로써만 그 기쁨과 아픔을 맛보았지만 얼마 전 내게도 그런 아픔이 닥쳐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아처럼 컸던 내게 아버지의 과거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정부에서 징용피해자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정신없이 살았으나 이제 약간의 여유가 생긴 뒤였다. 아버지가 징용을 갔다 왔다는 말은 들은 바 있었지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징용에서 돌아온 후 남의 집 머슴살이도 했고 나무 장사를 하며 모진 고생을 하다 53세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내가 벌써 그 나이를 훌쩍 넘겼으니 얼마나 한을 품고 돌아가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동안 아버지에 대해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생각다 못해 정부청사의 기록보존소를 찾았다. 반신반의하며 아버지 성함을 찾았는데 뜻밖에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1943년 3월 1일에 징용을 가서 해방이 된 후인 1946년 2월 3일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출신지가 옥천군 군서면 마암리로 되어 있었다. 원래 아버지 출생지는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였다. 마암리는 현재의 옥천읍으로 사양리와는 7~8㎞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마암리가 그 인근 징용자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이었다. 서류상으로만 보면 사양리 출신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결지를 출신지로 단순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아버지 성함과 동일한 분을 마암리에서 찾지 못한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런데도 구청 관계자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 하면서 그 실체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매우 기분이 상했다. 아무도 당사자의 심정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역사학자인 내가 보상금 따위나 탐내는 파렴치한인 것처럼 대하는 데 대해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무너진 탄더미에 깔려 대퇴부에 큰 상처를 입으셨고 제대로 식사를 못해 돌아온 후에도 내내 위장병에 시달리셨다. 보리개떡으로 허기를 달래며 속이 아플 때마다 소다를 드시곤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소다는 진통 작용이 있긴 하지만 위 벽을 더 깎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위천공으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우물 옆에서 펄펄 뛰시며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온 몸에 끼얹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지막 열을 식히시려 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내가 겪은 아픔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며 종군위안부로 청춘을 버려야 했겠는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처럼 강제 징용으로 탄광에서 고생하며 피해를 입었겠는가. 개인이나 국가나 시행착오나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잊을 수 있지만 그것을 미화하거나 덮어두려 해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광복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일본의 잘못에 대한 사죄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도 그 같은 잘못이나 편견은 갖고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나 국가에 피해는 끼치지 않고 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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