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최고의 문화명소로 인정받고 있는 프라도 미술관. 작품의 규모나 수준 못지않게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도 널리 알려져 있다. |
부끄러운 얘기지만 필자는 스페인의 화가하면 그저 고야나 피카소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정말 너무도 무식한 소치였다.
그곳 성당에서 마주한 성화(聖畵)와 십자가를 비롯한 제단과 천장에 새겨진 화려한 장식, 스테인드글라스는 스페인이 세계적인 미술가의 나라임을 이미 시사해 주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6월 15일 마드리드시내에 있는 프라도(Prado)미술관을 향하는 버스안에서 필자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꼈다.
우리는 흔히 문화국가, 문화도시를 논할 때 미술관, 박물관을 그 기준으로 꼽는다.
프라도미술관에서 가이드로부터 프라도미술관이 세계3대미술관에 속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300만점이 넘는 미술품과 유물을 지니고 있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쥬박물관과 뉴욕모마(근·현대 미술관), 프라도가 세계 3대미술관이며 미국보스턴미술관과 이탈리아 바티칸미술관이 세계 5대미술관에 들어간다고 한다.
또 세계 5대 박물관으로는 프랑스 루브르를 비롯한 영국의 런던박물관, 뉴욕메트로폴리탄, 대만고궁박물관, 이집트 카이로고고학박물관으로 필자는 26년전인 1985년 대만고궁박물관을 돌아보았는데 이번 여행에서 프라도미술관을 접했으니 동·서양 미술의 정수를 모두 본 셈이다.
마드리드시내 프라도거리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에는 오전 10시도 되기 전에 도착했는데 우선 외관에서부터 기가 죽었다.
200년전 지어진 건물임에도 현대적인 건축미가 짙게 풍겼고 내부로 들어가니 전시공간의 홀이 너무 넓은 것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프라도미술관 건물 하나만으로도 스페인의 문화적 위용은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스페인 곳곳에 있었다.
대전의 전시장에만 익숙한 필자로서는 한없이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적인 문화국가, 문화도시로의 벽이 정말 높고도 두텁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들이었다.
▲ 세계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프라도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모습. |
1492년 이슬람교도를 몰아낸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은 많은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 그녀의 후계자들인 역대 왕들은 궁정화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열성을 그치지 않았다.
특히 17세기 중엽이전에 펠리페4세는 마드리드에 공개적인 회화관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워 미술애호에 대한 그의 열정을 과시했다.
미술관건립은 몇세기에 걸친 스페인왕실의 현안이었다는 게 칸톤씨의 말로 16, 17, 18의 3세기에 걸쳐서 재임했던 11명의 스페인왕의 대부분이 회화구입에 정열을 쏟음으로써 프라도미술관 설립은 예고된 셈이었다.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3세는 왕실건물 하나를 미술아카데미로 만들고 동시에 미술과 자연과학에 관한 왕실 컬렉션을 건립하는 한편 왕립 산 헤로니모수도원의 목장에 식물원과 박물관을 세울 것을 명했다.
설계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J비야누에바에게 위촉돼 1785년 5월 30일 설계도가 제출되었다.
이 건물은 나폴레옹과의 전쟁 기간에 중단되었다가 1819년 페르난도7세때 완성돼 11월9일 왕립미술관으로 개관됐고 그 후 1868년 프라도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이 프라도미술관에는 8000여점의 회화가 소장돼있는데 로마시대의 조각에서부터 르네상스시대와 바로크시대의 다양한 작품과 태피스트리 등 유럽미술의 걸작들이 망라돼 있다.
이탈리아의 라파엘로, 티치아노, 틴토레토를 비롯, 벨기에의 루벤스, 반 다이크, 그리고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등 3대화가를 비롯한 리베라, 무릴료 등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프라도미술관의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욕심으로는 짧은 시간에 많은 그림을 보아야 했으나 오래서서 그림을 보는 일은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즐거운 고통이었다. 우선 전시된 그림의 크기가 거의 대형이었다는 점에서 주로 작은 크기의 그림에 익숙한 필자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음으로는 몇백년전 그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전시된다는 점에 놀랐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그 유명한 '시녀들'(Las Meninas, 1656년작) 앞에서 필자는 그림속의 어린왕비는 물론 시녀와 심지어 개의 표정이 생생히 살아있다는 착각속에 빠졌다.
이 그림은 현대화가 100명이 선정한 그림중 하나로 피카소가 너무도 심취해 수십편의 리메이크 연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명화 '시녀들'. 현대화가들이 선정한 100대 그림에 들어가 있다. |
아울러 각층의 벽면과 가운데 홀에는 로마시대를 비롯한 르네상스시대 등의 것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전시돼 있는데 이들 조각 역시 뛰어난 조형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 그림뿐아니라 1·2층의 여러 방에 전시된 작품들 모두 대형이었으며 당시의 색채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라도미술관에서 본 작품 중 백미는 역시 고야의 블랙시리즈였다.
이번 여행 중 고야라는 영화를 버스안에서 보았는데 영화가 보여준 그의 일생이 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라고사 출신인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는 화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궁정화가로 풍족한 삶을 누리기도 했으나 가톨릭의 부패와 종교재판소의 왜곡된 모습을 서슴없이 판화와 그림으로 표현했고 나폴레옹에 의해 파괴되는 조국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렸다.
유화·벽화·판화는 물론 초상화·풍속화·종교화·전쟁화와 풍자화에 이르기까지 화가가 그릴 수 있는 전방위적인 기법과 장르에 도전하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46세에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인간의 내면세계까지도 숨기지 않고 표현한 고야는 격변기에 신음하는 서민들의 표정을 생생하게 화면에 재현했다.
▲ 벨라스케스 자화상. |
세계최초의 누드화인 '옷을 벗은 마야' 역시 평민을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단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고야의 다양한 작품을 보면서 왜 그가 세계적인 화가이고 또 스페인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인지를 알 것 같았다.
들어오는 입구에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작가들의 그림책과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로 붐볐다.
간신히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집을 사들고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한편 미술관 내부에서는 몇몇 예비화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습작이 그려지고 있었는데 과거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은 후대 화가들의 손으로 또다시 계승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라도미술관에 머문 시간은 많지 않았으나, 서양미술의 거대한 흐름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되었고,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면서 예술이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지를 경험한 그런 시간이기도 했다./글·사진=조성남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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