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의미의 모호성으로 빚어지는 혼란도 있다. '공생발전'이라 하면 대충 알다가 친절하게 영어 주석을 붙이면 혼란이 시작된다. 모르면 몰라서, 알면 알아서 어렵다. '생태계형 발전(Ecosystemic Development)'으로 적고 '공생발전'이라 읽는 청와대의 의역은 거의 창작 수준이다. 진짜 '공생'인 '심비오시스(symbiosis)'로 쓰면 될 일이었다. 불교의 공업(共業)은 내키지 않을 테고 공존(coexistence)을 써서 안 될 건 없다.
악어와 악어새,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처럼 각 주체의 유기성에서 공생을 생각했다면 생물학 용어 '심비오시스'는 아귀가 들어맞는다. 목은 화를, 화는 토를, 토는 금을, 금은 수를, 수는 목을 낳는 오행설이 먼저 떠올랐겠지만, 청와대가 너무 동양적인 개념이라 피했다는 상생, 상생발전이 공생, 공생발전보다 낫다. 상생도 생태계에서 왔고 공생보다 '같이의 가치'가 동적이며 포괄적이다. 공생은 또 공생 나름이다. 서로 득이 되는 상리공생과 한쪽만 이득인 편리공생이 있다. 찔끔 얻고 남의 해만 끼치는 편해공생도 있다. 공생발전은 여기서 좋은 의미만 취했다.
생태적 프로세스는 그러므로 공생보다는 약육강식 쪽이다. 생태계에 타당해야 경제에도 타당하다는 귀납의 논리가 늘 맞지는 않는다. 전체성, 생명 아끼고 보호하기, 경계에 대한 인식과 인정, 사람과 자연의 연대가 생태계형이라면 공생발전의 가치에 넣을 만하다. 인간사회에도 생태계의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 환원자 같은 것이 있다. 특정 종이 망하면 전체 종에 악영향을 주는 자연계에서 발전전략을 끌어온 시도는 일단 파격적이다.
공생발전에 이어 이제 공생자본주의가 흘러나온다. 공생발전은 지금껏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았고 저작권자가 대통령임을 청와대는 은근히 자랑한다. 그런데 공생자본주의란 약자들이 당당히 뭉쳐 스스로 생존력을 키운다는 조합주의 방식으로 공동체자본주의와 함께 이전에 소개됐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청와대에서 보낸 이메일을 여니 “탐욕 경쟁에서 윤리 경영으로,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의 책임으로”라는 구절이 있었다. “공생발전은 정글에서 숲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포용적 성장'은 인도의 프라할라드 교수가 이름한 포용자본주의를 연상시킨다. 공생, 공생발전은 두 축이 대립되는 다른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알맹이 빠진 말잔치가 되면 '공생발전'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나 분비시키는 '고생(苦生)발전'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안 된다면 공생발전, 공정사회, 동반성장, 상생협력의 선이 좀 흐려져도 괜찮다. 공생이 서로 이익을 주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살아남기라면 대안발전의 가치는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뜻한 시장경제, 함께하는 성장 모델이 비난받을 사안은 아니다. 수식어 없이도 발전은 곧 진화다. 대전발전, 충남발전, 충북발전에서 보듯이 '발전'은 그 자체로 더 나아짐이다. 영어야 안 쓰면 그만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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