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반도에 위치한 터키는 수많은 문명의 발생지이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3개의 '구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차지점이기도 했다.
다신교 시대 때 터키 땅에는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성지들이 건축됐다. 이후 유일신 사상이 확산될 때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를 봉헌했다.
터키 전역에는 이와 관련된 셀 수 없이 많은 종교적인 성지와 성물,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같은 성지들은 특히 역사의 발전 과정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면서 성지순례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발자취를 체험하고 감동을 느끼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터키는 신앙의 발상지
▲ 트로이 유적지를 탐방하는 도중에 만난 터키인들과 함께 포즈를 잡았다. |
아나톨리아는 '어머니의 태양'이라는 뜻이다. 아나톨리아는 모두를 환영하고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일부 고대 문명은 태양을 숭배해 이를 본 딴 신성한 상징을 만들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태양의 온기는 오늘날 이 곳에 사는 터키인들의 웃음 속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럴까. 터키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성격도 명랑쾌활하고 매우 친절하고 낙천적이다.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해맑은 인상이었다.
국가나 개인이나 권력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역사와 예술과 문화와 모두를 포용하는 관용의 가치는 영원하고 보편적이라고 볼 때 터키인들은 이 위대한 인본주의적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느껴진다.
아나톨리아는 신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를 받던 많은 사람들에게 은신처가 되고, 자유의 땅이 된 곳이다. 고국에서 억압받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아나톨리아의 장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본주의에 기여했다.
외국인 관광객을 환영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은 이 곳 터키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신념이다. 근대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국가에 평화를, 세계에 평화를'이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을 정도로 터키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트로이는
▲ 한국가톨릭성지순례단은 터키에 도착한후 맨 처음 차낙칼레의 트로이목마 유적지를 찾았다. |
트로이는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지대의 나지막한 언덕 히실리크에 위치해 있다. 트로이 탐방의 기점은 다르다넬스 해협 아시아쪽에 있는 차낙칼레다.
차낙칼레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요충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남쪽 트로이 유적 탐방의 거점이 되는 곳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해로였다.
옛날에는 트로이를 공략한 아가멤논의 군대, 동방정복을 향한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그리스 원정을 떠난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 등이 '헬레스폰투스'라고 불렸던 이 해협을 건넜다. 현재도 차와 사람을 가득 실은 페리가 양 대륙을 오가고 있다.
트로이 유적의 입구부터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가 보이는데,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트로이 목마 근방의 작은 전시실에는 트로이 유적도와 발굴자인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의 사진과 유물 등을 진열해 놓았다.
트로이는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 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위치해 예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호메로스의 전승을 믿고 있었던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트로이 유적이 밝혀졌다. 트로이 전쟁의 장대한 역사와 보물 발견 이야기가 트로이 유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트로이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그리움이 이 도시를 찾게 한다. 알렉산더 대왕도 동방원정 도중에 일부러 트로이에 들러 아킬레우스의 묘에 제물을 바치고 갔다고 전해진다.
트로이(터키어로는 트루바) 땅에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다. 초기 청동기 문명 시대부터 트로이 역사가 시작돼 기원전 2500~2000년경에는 에게 해 연안의 교역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 번영-쇠퇴의 역사를 반복하며 총 9겹에 달하는 도시유적을 형성하고 있는 트로이 유적지 |
그 후 트로이는 이오니아인이 지배하다가 마케도니아 시대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로마 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 땅을 찾아왔다.
'트로이의 목마' 전설을 믿었던 독일인 슐리만이 히사르륵 언덕을 발굴한 것을 계기로 트로이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지금도 독일 남서부에 있는 튀빙겐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트로이의 목마 앞에서 만난 터키 청소년들이 한국인 순례자들을 보자 반가워하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한 남학생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필자와 함께 트로이의 목마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고마워했다.
잘생긴 또 한명의 남학생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권유해 필자의 카메라에도 담아왔다. 터키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친절과 호의는 상상 이상이다. 인물도 매우 좋은데다 친절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니 터키인들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됐다.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기원전 8세기경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에서 출생했다.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음유시인에 의해 전승된 소재를 호메로스가 재구성한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영웅 아킬레우스 부모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지 못하자 분노하면서 시작됐다. 에리스는 이들의 결혼식 연회식장에 가서 '가장 아름다운 분께'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연회석에 던지고 나와 버렸다.
이에 제우스의 아내인 '운명의 여신' 헤라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리고 제우스의 딸이자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자신이 그 황금사과의 주인이라 주장하며 다투게 된다.
이에 공정한 결론을 위해 경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경쟁의 장소는 이다산(현재는 키즈산), 심판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다. 그는 '고귀한 운명'을 주겠다는 헤라와 '지혜'를 주겠다는 아테나보다 '그리스 최고의 미녀를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에게 매수당해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건네준다.
그 후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그 당시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던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달아났다. 왕비를 빼앗긴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공격했으나 성이 견고해 함락시키지 못하고 10년을 끌었다. 그 때 오디세우스가 아이디어를 내어 병사들을 숨긴 커다란 목마를 트로이 성문에 두고 사라져 후퇴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트로이 군사들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고 들어가자 목마 안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시작해 성이 파괴되고 트로이는 멸망하게 됐다. 결국 그리스는 승리했지만 귀국한 아가멤논은 아내의 배신으로 정부의 손에 죽는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도 끝나게 됐다. 트로이 전쟁까지의 이야기가 '일리아드'이고 이후 오디세우스가 10년간 표류한 이야기가 '오디세이아'다. 일리아드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방대한 영웅서사시로, 모두 24권으로 구성돼 있다.
/터키 차낙칼레 트로이=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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