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소크라테스는 독주를 마주하고도 당당했다. 어려운 건 죽음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악을 피하는 것이라 말했다. 중요한 건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같은 장삼이사가 4대 성인 중 하나처럼 비장할 순 없다. 그래도 소크라테스의 말을 함부로 흘려선 안 된다. 개인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어떤 정부가 들어설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왕 사는 거, 좋은 정부를 만드는 좋은 시민으로 살 필요가 있다.
지난주 한 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 다녀왔다. 주제는 'MB정부의 미디어 정책 평가와 미디어 개혁 과제'였다. 토론을 맡은 지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미디어 정책을 나름대로 돌이켜보았다. 집권 초기에는 공공성이 강한 언론 영역에 시장주의가 만연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기에 그의 철학이 정책기조가 되는 건 당연하다. 다만, 모든 걸 자본논리로 해결하려는 '시장지상주의'를 걱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예측은 틀렸다. 현 정부는 일관된 철학이 없었다. 때로는 시장논리를 앞세우고 때로는 국가기관의 개입을 서슴지 않았다. 임기 내내 정권의 편의에 따라 '고무줄' 같은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그 결과 언론 생태계가 황폐화된 것은 물론 시장과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개개인의 삶을 책임질 순 없다. 그러나 시민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게 할 의무에서 자유롭진 않을 게다. 삶의 필수 영역인 육아·교육·취업·의료·노후 등에 대한 사회적 보장 체계를 갖춤으로써 일상생활의 안전성과 안정성을 도모할 의무 말이다.
비정규직·자영층·빈곤층·실업자 등 이른바 시장의 열패자들도 국가로부터 버려지는 영역으로 방치해선 안 된다. 반대로 재벌·종교·재산·언론·교육 등 그간 국가가 건드리지 못한 영역에는 촉수를 뻗쳐야 한다. 막강한, 그리고 합법적인 국가권력이 동원되지 않고선 약자와 강자 간 불균형이 대물림되어 확대 재생산될 것이 불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야 할 영역도 있다. 사생활과 의사표현이 대표적이다.
좋은 시민, 훌륭한 유권자가 되는 첫 걸음은 국가와 개인의 영역을 구분하는 안목에 있다. 반값 등록금 문제처럼 국가가 마땅히 개입할 지점에서 정부가 적절한 방법으로 관여하는지 헤아려야 한다. 유성기업 파업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안에서처럼 마치 경찰력이라는 공권력 행사를 빼곤 정부의 '행동하지 않음(inaction)'이 미덕인양 두 손 놓고 있는 게 옳은지 솎아내야 한다.
두 번째 걸음은 부당한 국가권력의 행사에 분노하는 것이다.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에 '훼방버스'라 맞불 놓는 게 과연 정부의 본분인가. 분노는 대안 없는 반대도, 단순한 화풀이도 아니다. 나치 독일에 맞서 프랑스를 지킨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이 일갈한 것처럼 “분노는, 저항이며 저항은, 창조”다.
국가를 포함한 외부 권력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는 미국은 바로 그 탓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적 시스템이 취약하다. 경찰력만으로 개인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불안해 총기 휴대를 합법화했을 정도니까. 의료보험도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둔 결과 가족이 아프면 가정이 파산하는 지경이 됐다. 가난의 구제도 부자의 기부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국가에 의한 공공 문제의 시스템적 해결이 부재한 사회는 필히 개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구성원들은 극심한 경쟁 환경에서 도박에 가까운 각개약진에 매달려야 한다. 남을 짓누르기 위한 처절한 경쟁과 피곤한 삶으로 점철될 도리밖에 없다.
좋은 시민, 훌륭한 유권자가 부재한 국가의 풍경은 이렇듯 암담하다. 그래서 난 조금 귀찮아도 좋은 시민, 훌륭한 유권자의 길을 밟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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