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오정동을 가면 병원 사이의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작은 규모의 의원들이 밤 12시까지 운영하는 야간 의원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야간 의원은 들어가는 인건비에 비해 수익률이 적어 개인 의원들은 시행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오정동은 무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4개의 야간 운영 동네의원들이 모여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한곳의 의원이 먼저 24시간 진료를 시행한 후 환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네의원들은 365일 24시간 의원을 운영하다 이제는 밤 12시까지 운영하는 단계로 정착이 된 상태다.
여전히 야간진료를 포기할 수 없는 의원들은 힘든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동네 의원들이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오랜 시간'을 선택한 것은 안타깝다.
연세포유 육순오 원장도 이곳 오정동에서 치열한 경쟁 반열에 올라있다.
20여년이 넘게 오정동을 지켜오며 수많은 지역 환자들을 위해 봉사해온 육 원장은 동네의원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네의원들 사이에서 지역에 봉사하며 '주치의'를 자처하고 나선 육 원장을 만나봤다.
▲ 대덕구 오정동 연세4U 의원 육순오 원장이 초음파실에서 임산부의 태아 건강을 살펴보다 카메라를 향해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상구 기자 |
육순오 원장은 1988년 대전에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올해로 벌써 23년째다.
2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출산을 도운 아이들이 장성해 대학을 다니고 군대에 다녀올 나이가 됐다.
“의사는 아픈 환자들을 봐야하기 때문에 힘든 직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산부인과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을 돌보는 분야예요.”
육 원장은 아무리 어려운 환자라도 4~5일이면 건강해질 수 있고 환자의 웃음을 많이 볼 수 있는 분야를 선택했다.
그 분야가 산부인과였다.
육원장의 부친은 논산 최초로 논산병원을 설립한 육완국 선생이다.
6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육 원장은 가족 5명이 의사인 집안에서 자랐다.
의사라는 직업의 선택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논산 출신으로 중학교 시절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연세대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원개원을 위해 고향을 선택했다.
너무 일찍 부모곁을 떠나 지내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논산 최초의 병원을 개원해 유명세를 떨쳤지만,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논산에서 병원을 운영하기보다 혼자 힘으로 '참 의사'가 되고 싶었다.
육 원장은 병원 개원과 함께 직원들의 친절교육을 시작했다.
대전 최초로 시행된 서비스 교육이었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병원은 서비스 개념이 정립돼있지 않았을 때다.
그는 “어느 시민단체에서 국내에서 가장 친절한 병원을 조사했는데 서울 제일병원 다음으로 우리 병원이었다. 시골의 작은 병원이 친절도 상위 그룹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화제였다”고 말한다.
실력은 물론 친절하기까지 한 병원은 동네에서 입소문을 탔다.
유명세 덕분에 당시에는 10층짜리 아파트 한동에서 30명의 자녀를 육 원장이 모두 받을 정도였다.
육 원장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세우기 힘든 기록도 갖고 있다.
한 산모가 5명의 아이를 제왕절개를 통해 출산하는 동안 모두 육 원장이 받아냈다.
한명의 의사에게 아이 5명을 그것도 제왕절개로 받아내는 것은 당시 대단한 기록이었다.
그는 서울에서는 시행하지만 지방에는 없는 폐경기 치료도 지역에 처음 도입했다.
폐경이후 여성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우울감에 빠진 환자들에게 그의 치료는 구세주와 같았다.
육 원장은 현재 미혼모 보호시설인 자모원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미혼모들의 분만을 돕는 봉사활동을 10여년 넘게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오정동에서 병원을 하는 모든 의원 선생님들이 자모원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있어요. 뜻깊고 따뜻한 일을 하고 계시죠.”
육 원장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인근 동네의원들도 선뜻 좋은 일에 동참하고 있다.
“지역에서 좋은일도 많이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진료하며 마음이 따뜻한 의사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하는 육 원장은 진정한 동네 주치의 였다. /김민영 기자 mi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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