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빈 공간 채워주는 '가장 한국적 텍스트'

역사서 빈 공간 채워주는 '가장 한국적 텍스트'

기존 사서에는 없는 숨은 이야기… '한 가문의 기록물' 한계 넘어 세계 유례없는 방대한 자료… 해외 한국학자들 학술적 가치 인정

  • 승인 2011-07-06 17:35
  • 신문게재 2011-07-08 9면
  • 임연희 기자임연희 기자
[족보있는 도시 대전:세계기록유산 등재 프로젝트] 1. 21세기에 왜 족보인가?

한국인의 족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방대한 가계기록이다.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472년간의 국가에 대한 공적인 기록이라면 족보는 한 가문의 사적기록이다.

역사책에서 볼 수 없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수대에 걸쳐 이어져온 가계기록이 한국족보박물관에 집대성 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를 담은 뿌리공원 성씨조형물은 대전이 뿌리 있는 고장임을 보여주고 뿌리를 보존하고 있는 족보박물관은 전국적 명소다.

본 시리즈는 전국 족보의 90%를 출판하는 족보 있는 도시 대전을 세계기록문화유산 도시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대전이 왜 족보메카인지를 시작으로 족보박물관과 선비문화, 재미있는 족보의 세계, 족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전략 등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 배재대 중앙도서관 족보자료실 모습.
▲ 배재대 중앙도서관 족보자료실 모습.
대전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에 있는 한국족보박물관. 평일 하루 평균 3000명, 주말에는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대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향토사료관과 대전의 선사문화를 알 수 있는 대전선사박물관에 하루 300명의 관람객이 채 안 오는데 비하면 엄청난 관람객 수다.

족보박물관의 또 다른 특징은 노년층 관람객이 많다는 것이다. 손자손녀에게 우리 가문의 뿌리를 폼 나게 들려주고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꼼꼼히 받아 적고 사진도 찍어가며 열심이다. 대전시민보다 외지관람객이 훨씬 많다는 게 족보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주중에는 주로 타 지역에서 관광버스를 이용해 방문하는 중장년층이 많고 주말과 휴일에는 가족단위 관람객이 주를 이룬다”면서 “뿌리공원 입구인 족보박물관에서 족보와 성씨에 대해 공부한 후 자신들의 성씨유래비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도 트위터 친구를 맺고 소통하는 스마트시대에 왜 족보인가?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족보에 대해 “단순히 누가 누구의 자손이고 그 자손은 어떠하다는 식의 단순 계보적 접근을 넘어 족보는 기존 역사서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미시사적 관점에서 한 가정이 시대를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고 평가했다. 더 이상 족보를 '죽은 자의 명첩(名帖)' 정도로 폄하해선 안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한 집안의 역사책인 족보는 해외 한국학자들에 의해 '가장 한국적인 텍스트'로 평가받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학술자료다. 공적인 역사서술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묻혀 있던 이야기를 담은 족보의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청학동 훈장'으로 유명한 김봉곤(44)씨는 '족보'라는 자신의 책에서 족보를 '살아 있는 어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족보는 내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문벌을 자랑하는 양반들이나 들먹거리는 전근대적 유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며 “족보에 적힌 작은 사연은 문중의 전설이 되고 충신, 학자, 효자·효녀 등 족보 행간의 기록들은 '피의 기록'이자 '혈연의 역사'로 계승돼 족보는 죽은 자의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집안의 어른”이라고 말했다.

▲ 침산동 뿌리공원에 있는 한국족보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중구]
▲ 침산동 뿌리공원에 있는 한국족보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중구]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초 족보는 1476년(성종 7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 '성화보'다. 이 집안 출신의 한 정치인은 학창시절 운동을 좋아해 고교 진학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돌다 아버지가 보여준 족보를 본 뒤 이대로 살다가는 가문과 조상에 누가 되겠다는 생각에 제자리를 찾았다고 토로한적이 있다.

한 집안의 계통을 담은 가계기록이 사람의 인생까지 바꿔 놓는 것을 보면 족보는 더 이상 먼지 쌓인 묵은 기록차원을 넘어 집안의 정신적 지주인 셈이다.

이에 대해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는 “한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는 문중의 역사가 있다”면서 “족보는 뿌리에 대한 가지들의 기록으로 혈연으로 얽힌 이 가지와 뿌리를 찾는 작업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정보통신의 발달과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이 급속히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서 성씨나 족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줄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족보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기록이며 구체적으로는 당시 인물들의 출신지역과 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신뢰도에 따라 다른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족보가 갖는 역사성과 사료적 가치를 보더라도 족보는 더 이상 특권층의 상징만은 아니다”라며 “최근에는 문헌으로 된 족보 발간과 동시에 전자 족보 내지는 인터넷족보의 발간도 활발해지는 등 기록과 간행방식들만 변할 뿐 족보는 여전히 소중한 가계기록으로 집안을 지키고 이어주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류용환 대전선사박물관장은 “역사에 기록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족보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특이한 문화현상”이라며 “우리나라는 일찍이 문자와 인쇄술의 발달로 족보문화도 계승 발전될 수 있었는데 족보를 단순한 가계기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이를 재평가하고 연구해 인류의 공통의 자산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연희 기자 lyh3056@


<관련 기사>
•[송백헌]족보(族譜)의 현대적 의미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10706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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