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후 리더의 덕목·신뢰 교훈
▲ 민찬 대전대 교수 |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북학파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한번 다녀오기를 오매불망 소원하던 연암에게 거짓말같이 연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넉 달 동안의 연행길에서 돌아온 연암이 작심을 하고 써내려간 책이 열하일기다. 그런데 그 책의 서두에서 이처럼 숭명배청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천만뜻밖의 일이다. 하지만, 연암 특유의 비딱체 화법에 익숙하다면 그것이 역설과 반어에 얹힌 조롱과 연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의종(1610~1644년)의 연호이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이 거용관 장성을 넘어 북경 외성으로 들어왔을 때 숭정제는 황자들을 탈출시키고 황후 주씨와 이별의 잔을 나눈다. 황후가 스스로 목을 매 죽은 것을 확인한 황제는 열다섯 살의 장평공주와 여섯 살의 소인공주를 찾아 차례로 칼을 내리쳤다. 모든 것이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황제는 스스로 종을 쳐 백관을 불러 모았지만 누구 하나 나타나는 자가 없었다. 환관인 왕승은 한 사람만이 곁을 따르고 있었다. 내성인 지금의 자금성이 허물어지자 황제는 왕승은을 데리고 성 바깥에 있는 경산으로 향했다. 푸른 옷을 걸친 황제의 오른 발에는 붉은 신이 있었지만, 왼쪽 발은 맨발이었다. 머리에는 관도 없었으며 긴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황제는 경산의 정상부 수황정 앞에 서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모든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것은 왕승은 뿐이었다. 자신의 직무를 다한 왕승은 또한 황제를 뒤따라 나무에 목을 맸다. 황제가 입고 있던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짐이 17년 재위에 있으면서 동인이 세 번 내지를 침략하고 역적이 곧바로 경사에 육박하였다. 짐은 덕이 박하고 신체가 허약하여 위로 하늘의 꾸짖음을 구한다. 그렇지만, 여러 신하가 짐을 그르쳤다. 짐은 죽어 조종을 뵐 면목이 없어 스스로 관면을 버리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적으로 하여금 짐의 시신을 갈가리 찢게 할지언정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게 하지 말라.” 황제는 백성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죽음에 임해서도 여전히 망국의 책임을 신하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가 숭정제이다.
명나라 망국의 책임은 숭정제보다는 숭정제의 조부 신종 만력제에 있다는 것이 역사학 쪽에서의 평가이다. 그렇기는 하나 숭정제 또한 제대로 해낸 구석이 없다. 파탄에 빠진 재정을 충당코자 가혹한 세금을 부과한 것은 전조부터의 일이었으나 숭정제에 이르러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 결과 농민이 유민이 되고 유민이 반란군이 되어 나라 전체가 흔들렸다. 이자성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숭정제의 과오는 또한 그가 사람에 대해 의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적국의 이간술에 말려 명장 원숭환을 죽인 것은 천고의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이번 북경 여행 중 학생들과 함께 경산에 오른 것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 될 것 같다. 수황정을 돌며 내려다 본 광활한 북경의 모습은 일품이었다. 겹겹이 보이는 자금성 전각의 지붕들, 서쪽 아래에 떠 있는 북해와 백탑, 그 너머로 하늘 가장자리를 달리는 산맥의 풍경이 어우러져 자금성에 갇혀 있던 답답증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내려오는 길에 맞닥뜨린 숭정제의 목맨 나무는 그것이 다시 심은 나무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반추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우리 학생들에게 여유 있게 설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쉬움은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리더의 덕목, 인간에 대한 신뢰, 이유 없는 자신감 혹은 내부로 닫힌 논리, 연암 박지원의 생각과 열하일기, 명나라 혹은 숭정제와 조선 사람들, 명청과 동아시아 등 그리고 또 포함시킬 것이 있다. 조상님 묘역에 서 있는 비석의 글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으로 시작하여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로 끝나는 그 글의 의미 등.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