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순택 논설위원 |
일요일 오후, 무료할 땐 그러하듯 리모컨을 아무렇게나 눌러대고 있었을 거다. 그때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 필이 꽂혔다. '너를 위해'였다. 그것도 임재범이 직접 부르고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아내가 듣던 노래였다. 어느 여성 가수가 부르는데, 임재범의 노래로 그래서 원곡의 참맛을 맛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꿈이 현실이 되어 화면에 펼쳐지고 있었던 거다. '전쟁 같은 사랑'을 토해내는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취했고 클라이맥스로 치솟는 원시적인 에너지에 반해버렸다.
그날 이후 '나가수'의 팬이 됐다. 임재범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보아의 '넘버 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이소라의 도전정신을 좋아하지만 두 사람이 떠난 뒤에도 일요일 오후가 되면 TV 앞에 앉는다. 누가 1등을 하고 누가 탈락하는 지엔 관심이 없다.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들이 펼치는 멋진 노래의 향연이 그저 좋을 뿐.
기특한 건 아비의 말에 시큰둥하던 아이들이 말을 걸어온다는 거다. YB의 미션곡으로 '커피 한 잔'이 선택되자 아이들은 “펄시스터즈가 누구예요?”하고 물어온다. 이게 얼마만이냐 싶어, 배인순 배인숙 자매가 얼마나 예뻤는지, 작곡자인 '록의 대부' 신중현이 얼마나 대단한 기타리스트인지 침 튀기며 설명해줬다. 그리고 나는 김범수가 어떤 노래를 불렀고, 어떤 노래가 좋은지 물었다. 7080 세대의 음악을 '구리다'고 흰눈질 하던 아이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호감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노래를 이해하려 하고 있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나가수'는 참으로 단순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일깨운다. 가수는 역시 노래를 잘 해야 한다는 거다. 연예인이 다방면의 재주로 대중을 즐겁게 해줘야하는 엔터테이너 시대에도 가수의 생명은 모름지기 가창력이다. 가창력하면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있는 것 없는 것 그냥 다 쏟아내며 하얗게 자기 소리를 태우는 것도 감동이지만 '나가수'의 진짜 맛은 '편곡'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가수, 다른 장르의 노래를 자신에 맞는 색깔로 바꿔 '자기 음악'으로 가수답게 들려줄 때 나는 감동한다.
그것은 숨겨진 재능을 끄집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 다움'을 확인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주어진 위치에서 기본에 충실하고 관료는 관료답게, 기업가는 기업가답게, 아버지이자 서민인 나는 나답게 산다면 대통령의 입에서 “나라가 온통 썩었다”는 한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 다울 때, 가수가 가수다울 때 비로소 “나는 가수다”라고 외칠 수 있다.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대학생다움'을 보았다. 백골단과 최루탄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던 기성세대들에게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존재였나. '사회의식도 없고 패기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절규하고 분노하고 있다. 아마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건 1990년대 중반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등록금의 무게에 짓눌려 대학생이 복권을 긁다가, 두 아들을 둔 50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어제오늘의 일이다. 등록금이 '살인적'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 땅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의 절박감을 절규하고 있는 거다. 분노는 '성냄'이나 '화냄'이 아니다. 프랑스의 인권 환경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화제다. 그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며 “분노하라, 그러면 바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크라이나의 시인 네크라소프도 노래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이제 기성세대가 답할 차례다. 정부나 정치권이 립 서비스나 했다간 탈이 나도 큰 탈나게 생겼다.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꾸는 행동을 시작했다. 대학생다워진 그들의 외침을 나는 이렇게 듣는다. “나는 대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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