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허권수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한문학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명학연구소 소장과 중국 화중 사범대학 역사문화학부 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한국학술사와 한중문화교류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후기 남인과 서인의 학문적 대립』외 12권과 논문 다수가 있다.
남명 선생은 1501년에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연산군이 집권하던 시기이고, 퇴계 이황이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기묘사화로 인해 나라를 바로 잡고자 했던 어진 선비들이 무고하게 간신배들에게 모함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특히 열아홉 살 때 절에서 공부하다가 조광조의 부고를 들은 남명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강직하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억울하게 파직을 당해서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본 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리라는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남명은 공부의 목적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또는 공명을 얻는 데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1차 과거시험에는 합격했지만, 2차 시험은 어머니를 설득하여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세나 명예 보다는 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닦아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데 더 큰 뜻을 두었던 것이다.
남명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스스로 몰려와 문하생이 되었다고 하는데,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정승을 지낸 정인홍, 최영경, 김우옹, 윤휴, 유형원 등이 있었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조식 선생의 제자였다는 것은 '의(義)'와 '경(敬)'를 강조한 남명의 교육관이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참여에 행동지침을 마련했다는 데서 남명 선생의 실천학문사상이 드러난다.
남명이 올곧은 선비라는 증거는 여러 일화를 통해 나타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명종에게 고한 '단성소'라는 상소문이다. 이 상소문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부패한 왕실과 탐관오리로 들끓는 조정을 통렬하게 비판한 명문이다.
특히 수렴청정을 하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라고 칭하고, 백성의 소리에는 관심이 없고 어머니 말만 듣는 명종을 '고아'라고 불러 부패한 왕실을 대놓고 비난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였으니, 이 사건만 보더라도 조식 선생이 얼마나 정의감과 용기가 있는 선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종, 명종, 선조 3대에 걸쳐 조식 선생에게 관직을 맡아달라고, 임금들이 친서도 보내고,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 보약도 보내주면서 간청을 했지만, 조식 선생은 모두 거절하고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벼슬을 거절할 때 마다, 그저 관직을 사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부덕해서 조정에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있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는 백성이 화가 나면 나라도 뒤엎을 수 있다는 충언도 용기 있게 고했다. 그리고 임금이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여 같이 더불어 일할 맛이 안 난다는 암시를 여기저기 드러내며, 임금보고 학덕을 더 쌓으라고 훈계를 하기도 했다.
이 책은 남명 조식 선생이 같은해 경상도에서 태어나 기호학파를 이끈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대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적 사고에서 저술을 남기지 않아 후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생애와 사상, 학문을 포괄적으로 정리한 첫 평전이자 남명학 연구성과를 쉽게 풀어 쓴 대중서이기도 하다.
민생이 파탄되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져도 올바른 소리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혼란의 시대에 잊혀져가는 선비정신을 다시 일깨워주는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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