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한국인들은 '밥심'을 알고부터 시나브로 인생을 알고 사랑을 알아간다. 나폴레옹도 군대는 밥통으로 싸운다고 했고, 마음으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 밥통이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밥으로 몸, 그리고 마음의 허기마저 채운다. 어떤 문화권에 가면 남녀가 밥을 먹는 행위는 성적 친밀감의 표시다.
그럼에도 식문화와 의식의 근접성은 우리만큼 강할 수가 없다. 서양에서 '빵을 함께 나눠 먹는 사람'을 '동료(companion)'라 하지만 느슨하다. 밥 식(食)에 입 구(口), '식구(食口)'엔 한솥밥의 끈끈함이 잘 살아 있다. 옛날에는 반찬을 차려내도 밥은 나누지 않던 일부의 풍습으로 나그네 상인들은 작은 솥을 휴대했다. 첩의 솥을 별도로 둬서 밥을 짓기도 했다. 식구로 인정 안 하겠다는 결연한 텃세다.
그 바람에 가수 이효리의 '밥 한 번 먹자' 광고가 먹힌다. 밥벌이들이 모여 이 사회의 밥벌이를 규정하고 이 사회는 일정한 방향으로 간다는 정치경제학자의 견해에 상당히 공감한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지금 옥신각신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내심으로는 이해가 된다. 밥이 법이고 법이 밥인 그들이다. 내 경우, 법조계 친구를 만나면 검사 편이고 경찰 간부인 조카를 만나면 경찰 편을 든다.
그러면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얻어먹는다. 뇌물은 아니니까 괜찮다.
근 20년 동안 밥 한 끼의 약속을 남발해 오던 지인이 있었다. 드디어 그와 감격스러운 점심 자리가 성사됐다. 평범한 음식이지만 우주와의 조응으로 맺어진 신성한 밥으로 행위양식을 공유하는 의식을 치르듯 먹고 마셨다. 헤어지며 언제든 공수표가 될 말을 쌩 공중에 날렸다. “(죽기 전에) 언제 밥 한 번 더 먹자.”
'언제 한 번'의 언제가 언제든 상관없다. 돌아오지 않을 날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순간 스스로 반쯤은 철학자가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규정했다. 존재 의미를 묻는 자인 현존재지만 밥 없이는 굶어죽는다. 외국인의 한국어 테스트에 최적의 단어가 '죽는다'는 표현이다. '죽다' 하나만 알면 초급, '숨지다, 눈감다, 돌아가시다'를 알면 중급이다. '식은 방귀 뀌다', '밥숟가락 놓다'를 알면 고급 한국어 구사 수준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밥 한 끼, 아니 모든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은 대상에 대한 호감을 높인다. 실험 결과가 입증한다. 참가자를 A, B 두 그룹으로 나눠 과학벨트, 세종시, 밥벌이 등 주제가 딱딱한 칼럼을 읽힌다. A그룹에 땅콩과 음료를 줬고 B그룹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칼럼을 다 읽게 하고 점수를 매겼더니 A그룹이 훨씬 후한 점수를 줬다. 땅콩, 음료에서 얻은 즐거움이 글의 이미지까지 고양시킨 것. <안과 밖>을 열독할 때는 되도록 맛있는 음식의 마력에 빠지시길 삼가 권한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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