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배 목원대 총장 |
얼마 전엔 매우 유행하던 드라마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지인과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주인에게 채널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과의 대화도 중지한 채 모두 그걸 쳐다보느라 음식이 식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당 주인도 눈을 화면에 고정한 채 장사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말 그대로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모든 게 중지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수의 관심이 동시에 한 곳으로 쏠리는 일의 예는 이뿐만이 아니다. 어느 유명 걸 그룹의 춤과 노래가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학생들의 옷차림이 '모두' 그들의 모습처럼 변하였다. 어떤 때는 너무 추워 보이기도 하고 활동하기에 불편할 법도 한데 그런 차림으로 학교를 오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다. 자유롭게 옷을 입을 수 없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교복을 뜯어고쳐 입느라 난리란다. 개성을 꽤 중시하는 시대라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남들 따라가는 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현상은 아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산에 가보면 똑 같은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산을 오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인들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 중에는 온통 어느 디자이너의 이니셜로 도배한 특정 회사의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을 온통 비슷한 영어 유치원이나 학원에 보낸다. 다른 집 아이들이 거길 가니 불안한 마음에 우리 아이들도 덩달아 보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남 따라서 지나치게 한 곳으로만 휩쓸리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런 쏠림 현상의 이면에는 소외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을까봐 불안해지고, 다들 입는데 나만 안 입어서 이상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말이다. 최근엔 스마트 폰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그 비싼 요금을 지불하면서까지 앞 다투어 그걸 들고 다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니까, 그걸 들고 다니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구식처럼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그룹에서 왕따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휩쓸림은 곧 종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의 자원이 부유한 나라로 흘러 들어가 가난한 나라를 대가(代價)로 해서 부유한 나라를 더 부유하게 만든다는, 한 때 유행하던 종속이론처럼, 새로운 것, 인기 있는 것, 좋은 것에 대한 선호는 그런 것들을 생산하는 사람들만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뿐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결핍상태에 빠뜨린다. 얼마 전에 산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다 익히기도 전에 업그레이든 된 새 스마트폰이 나왔다. 또 따라가야 할지 망설여질 법도 하지만, 현재 사용하는 기기가 그 자체로 한참 앞선 기기인데도 또 다른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미흡하다면, 조만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기기로 갈아타지 않을까 생각된다. 종속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 전혀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소외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런 흐름에 한두 번 눈을 감아버리면 아무렇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의식·무의식적으로 남들의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그 무리의 크기를 키워놓고 거기서 벗어나면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큰 덩어리가 가는대로 따라가는 것은 우리를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의 하나로 만들 뿐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그것을 가꾸어 이 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아니다.
노자(子)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의 이상향에서는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런 나라에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남을 따라가는 것은 좀 곤란하다. 남을 따라가는 것은 불행의 한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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