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 들녘에서 파릇파릇한 어린 모들이 바람에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면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이 가녀린 어린 모에는 농부들의 온갖 정성이 담겨 있다. 논에 모내기를 하기 전에 묘판을 만들고 볍씨를 뿌려 어린 모를 키우는데 어린 모를 키워내기까지 쏟는 정성이 대단하다. 볍씨를 물에 불려 따뜻한 아랫목에 재워서 싹을 틔운 뒤에 묘판에 볍씨를 뿌리고 밤낮없이 물관리를 하여 새싹이 뿌리를 잘 잡도록 한다.
새싹이 뿌리고 잡고 자라기 시작하면 묘판에 대한 치밀한 관리에 들어간다. 특히 모 이외의 다른 식물들이 침범하면 묘판을 망치게 되고 묘판을 망치면 한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묘판을 관리하였다. 특히 다른 풀들은 어린 모와 잘 구분되어 별 문제없이 뽑아 낼 수 있다. 하지만 모와 비슷해서 잘 식별이 안되는 풀이 있다. 그 풀이 바로 피다. 이 피를 잘 식별해서 뽑아내는 일을 피사리라고 한다. 묘판에서 피를 잘 골라내는 것은 어릴적부터 익혀온 경험이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릴적부터 아버지, 할아버지와 같이 일하면서 피와 모의 생김새나 특성을 자연스럽게 익혀서 피만을 뽑아 내야 한다. 잘못하여 모를 뽑아내면 그보다 더한 낭패는 없다. 만약 피를 잘 골라내지 못한 묘판의 모를 그대로 논에 모내기를 하면 온 논이 피로 뒤덮이게 되어 그해 농사는 망치게 된다. 모가 자라감에 따라 피도 함께 논에서 자라기 때문에 시간이 날때마다 피를 뽑아내고 심지어는 벼가 익어갈 무렵까지도 가려서 뽑아내지 못한 피가 있으면 피의 이삭이라도 잘라내야 다음해의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 만약 게으름을 피우다가 피가 영글어서 그 씨앗이 온 논에 퍼지면 볏논이 아니라 피논이 되어 버릴 뿐만 아니라 다음해 농사를 위한 온전한 볍씨를 얻을 수가 없게 된다. 오죽했으면 쌀을 얻을 때까지 88번의 손이 간다고 했을까? 그래서 한자의 쌀미(米)자가 88번의 손질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고객창출협력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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