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
당시 6·25 전황을 지방민에게 신속히 알리려는 목적으로 창간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학도병으로 전장 일선에서 싸우고 있었으므로 지방지의 창간여부를 알 길이 없었다.
1960년대(5·16혁명 당시) 나는 현역군인으로 대전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대전일보와 쌍벽을 이루며 지방지로서 맹활약하는 중도일보를 눈여겨 보았다. 당시 대전시청 바로 뒤에 전시 헌병대가 있었는데 그 땅을 매입하여 경암빌딩을 거창하게 세웠고, 중도일보 창업자인 이웅렬 사장의 사무실을 자주 찾은 기억이 선하다. 그분은 선각자였다.
중도일보 현판 옆에는 큼직한 현판 3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1. 서해안 ABC지구 간척사업추진본부 2. 대전 천도촉진 운동본부 3. 충남개발촉진 운동본부'였다. 그때의 눈으로 얼핏보면 돈키호테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재조명해보면 그 분은 분명 선각자이자 선구자였다. 왜냐면 그 세 가지 꿈이 모두 실현됐기 때문이다.
육군소령인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정중히 맞이해주셨고, 상좌(上座)를 권하며 많은 대화를 이어가도록 배려해주셨다. “국가의 장래는 이인구 소령같은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장교의 어깨에 달려있다!”며 격려를 해주곤 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써 준 '直筆正'이란 휘호를 항상 사장실 소중한 장소에 걸어놓고 집무했으며 그 역사적 휘호원본은 오늘의 중도일보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한다. 역사는 항상 헛점이 있으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역설(逆說)처럼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초 유신을 하게 됐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1973년도에 중도일보는 돌연 폐간되어 그 후 복간될 때까지 십 수년간 애독할 수 없게 되었다.
중도일보의 암흑기가 가시고 또다시 지방지로서 복간될 즈음 이웅렬 회장은 나를 찾아 복간에 따른 입장과 향후문제를 의논하며 함께할 수 없겠느냐고 의향을 물어왔다. 나는 “축하합니다. 언론사에 중립적이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뒤에서 밀어드리고 애독하겠습니다”라며 동업을 사양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각이 나면 칼럼형식이나 공개제언형식의 글을 중도일보에 단골로 게재하고 있다.
창간 60주년을 맞은 중도일보에 축하를 드리며, 앞날에 번영과 영광이 가득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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