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태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자파센터 책임연구원 |
휴게소 한 쪽에는 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서른 여개의 건설 및 시설회사들이 협력하여 도로를 완공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내가 달리던 고속도로는 아홉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공사가 진행되었고 긴 터널도 여럿 뚫렸다. 수년 동안 공사현장에 사용된 거리 측량기들은 우리나라 측정표준체계에 연결되어 정확한 측정값을 표시했을 것이다.
각기 다른 공사구간에서 현장 작업자들이 매일 측정값을 활용하여 도로를 건설한 다음, 그것들을 서로 이어 마침내 뻥 뚫린 고속도로를 완공했다고 생각하니 일상 중에 일어나는 측정의 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한편으론 사물의 길이나 이차원 형상에 대한 측정표준을 개발하느라 고민하는 동료의 얼굴도 떠오른다.
휴게소 내 도서진열대에서 우연히 책 한권을 집었다. 정약용의 일일수행이었다. 그는 책에서 사람은 인격과 자질을 높이기 위해 수양에 힘써야 하고 그런 후에 남을 위한 봉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버지로서의 다산은 아들에게 '여러 날 밥을 짓지 못하는 가난한 집에 쌀 한 되라도 주어 배고픔을 면하게 해 주는지, 병들어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 한 푼의 돈이라도 나눠 주어 약을 지어 먹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지'를 물었다. 세심한 다산의 마음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섬길 대상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섬길거리'가 있으면 그 섬김이 더욱 빛나지 않을까?
필자가 몸담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은 35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측정표준과 측정기술을 개발해 왔다. 이것을 국내 여러 기업과 연구기관에 보급하여 왔으며 이제는 그 범위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작년 여름 연구원에서는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하여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태국, 터키 등 8개국 측정표준기관장들을 초청하였다. 이 나라들과 측정표준 협력방안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개발도상국은 측정표준확립 및 연구개발 수준이 낮아 산업개발 및 무역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나라들의 측정표준기관은 선진국에 비해 짧은 기간에 크게 발전한 우리 기관에 다양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우리 측정표준전문가들이 현지에 가서 그들을 돕기도 하고 그 나라 전문가들을 우리나라에 초청하여 전문지식을 교육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져 지난 달 23일 우리 기관은 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와 양해각서를 맺고 개발도상국 공동지원사업을 펴 나가기로 하였다. 그동안 땀과 노력으로 축적한 측정표준과 기술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섬길거리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가정과 사회에서 섬길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대로, 기술자들은 기술로, 전문인들은 전문지식으로, 연구기관들은 연구성과로 국내외 개인이나 공동체를 돕기 위해 실력을 쌓고 있다. 섬길 대상을 발굴하여 미리 준비된 섬김의 재료를 적절한 때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세상을 넉넉하게 한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미래의 섬길거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우리나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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