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인 에어 |
'제인 에어'를 소설이 아닌 영화로 본다는 건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를 만난다는 거다.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유명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낡은 주인공을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으로 재탄생시키는 감독의 시도가 배우를 통해 고스란히 투영된다. 1914년 어빈 커밍스를 시작으로 22차례나 TV시리즈로 영화로 만들어진 동명의 작품들이 감독 이름보다 수잔나 요크, 사만다 모튼, 샬롯 갱스부르 같은 여배우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96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제인 에어'에서 샬롯 갱스부르는 꽉 다문 입술로, 아집으로 똘똘 뭉쳐 보는 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제인을 보여줬었다. 그럼 22번째 제인, 발음하기도 힘든 미아 와시코우스카는?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와시코우스카를 통해 소녀적 감성을 제인에게 불어넣는다. 언어, 미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한편 가정교사 신분임에도 귀족 로체스터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당찬 소녀로 되살려냈다. 여기에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내면까지 겹쳐 보면, 현대적 '알파걸'의 이미지가 물씬하다.
19살 소녀의 순수한 얼굴에 어른의 눈빛을 가진 와시코우스카는 감성적 소녀와 고뇌어린 여인의 중간에 선 제인을 제 옷을 입은 양 소화해냈다.
와시코우스카의 차기작을 준비 중인 박찬욱 감독은 “오드리 헵번처럼 우아하고 니콜 키드먼처럼 도전적”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표정 없음으로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당혹, 끌림, 사랑, 의문, 체념, 기쁨, 슬픔의 그림자를 차례로 띠었다 지우는 와시코우스카의 얼굴은 매혹 그 자체다.
후쿠나가 감독은 제인뿐만 아니라 고딕호러에 가까운 원작의 음울한 분위기를 걷어내고 화사한 봄볕을 화면에 끌어들인다. 제인이 로체스터와 벚꽃 만발한 꽃밭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은 그림엽서처럼 곱다. 여성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겠지만 강직한 브론테 팬들은 오글오글 거북살스러울 것 같다. 여하튼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 '눈 비비고 들여다볼 만한' 고전 시대극이 새 봄과 함께 왔다. 훌륭한 재해석,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에 오랜만에 취했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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