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희 대전도시철도공사 사장 |
습관적으로 쓰레기를 들고 나와 그곳에 버리려던 사람들은 앙증맞은 꽃이 피어있는 낯선 풍경, 화단을 목격하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되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덕지덕지 붙여 놓은 강력한 처벌 경고문이나 CC-TV가 만능처럼 여겨졌지만 아주 작은 상황변화만 있어도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물론 이와 반대의 상황으로 쓰레기가 없던 곳에 한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면 금새 쓰레기장이 되버렸듯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두 얼굴을 목격한다.
몇 년전 서울의 한 지하철에서 전동차에 끼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25t이 넘는 전동차를 밀어 부치는 사진이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숫자 3의 법칙’이라는 것인데, 세사람이 어떤 상황을 만들면 금새 수십, 수백명이 그 상황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한 두사람이 하면 거들떠 보지도 않을 일을 3명 이상이 나서면 제 4,5의 동조자가 나선다는 법칙이다.
상황의 힘과 함께 미디어의 영향력을 동시에 보여 주는 실험도 꽤 흥미로웠다.
‘가’반 초등생에게는 한 어린이가 할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사는 동영상을 노출시켰고 ‘나’반 학생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날 방과후 선생님은 각 각의 반 아이들에게 ‘내일 학교에 올때 이웃돕기 성금을 가져오라’고 했고 다음날, 동영상을 봤던 ‘가’반 학생들은 대부분 성금을 가져왔을 뿐만아니라 그 액수도 많았다.
반면 ‘동영상’을 경험 하지 못한 ‘나’반 학생들은 성금 목적보다는 평소 가지고 있던 용돈을 성금화해 내는 경향을 보인데다 모금액도 적었다.
‘가’반 학생들에게는 전날 보았던 어린이의 딱함이 뇌리속에 남아 곧바로 성금을 내야한다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선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처럼 긍정적 상황과 그에따른 가치있는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한 상황에 따라 끔찍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다.
수십년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실험사례로서 피실험자 앞에는 50V(볼트),100V,150V,300V등 전압 스위치가 있고 피실험자가 볼 수 없는 건너편에는 전선에 사람이 연결돼 있다고 속였다.
실험자는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오답을 내면 피실험자에게 정해진 전압 스위치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물론 방에 있는 사람은 오답만 내도록 사전에 각본이 돼 있었다.
실험자는 이에앞서 동료 심리학자,사회학자들에게 과연 인체에 치명적인 전압스위치를 올리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지 사전에 문의해 봤다.
응답자들은 약 5% 미만으로 ‘희망’했으나 실제는 70% 가까이 자신의 행위(고압 스위치 올리기)가 방안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경험과 학습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명령에 따랐던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마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가능했던 ‘상황’이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해보니 매우 섬뜩했다. 두 말할 나위없이 이러한 ‘상황론’에 따른 행위와 결과가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고전적 진화론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유전자에 따라 타인과 환경을 상대로 무한 경쟁과 극복을 통해 살아남으려 하고 후세를 보전한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기적 인간이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타심을 갖나’하는 의문을 풀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 미시건대학교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팀은 감정적으로 가깝다고 느끼면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증가해 나를 희생하더라도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이타심이 든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친해지면 돕고 싶은 호르몬이 생기며 스트레스는 감소하는 이타심으로 사회적 친밀도가 높은 사람은 더 건강하고 오래 살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병에 잘 걸린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두 얼굴 가운데 어느 모습을 좀 더 자주 보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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