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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태준 연극연출가ㆍ배재대 공연영상학부 교수 |
낯선 사물의 존재 증명은 역설적으로 확실한 부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체로 관계의 세계에서 낯설다는 건 지독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공산이 크므로. 그때 우린 그 낯선 사물의 존재 환경을 야생(野生)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그곳은 우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떠나온 어떤 지형(地形)의 한 지점 같은 곳일 게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에게 야생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내가 자의적이라 규정한 ‘처참함’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물음이 야기한 결과이다. 생태계적 사고의 기원은 이렇듯 처참한 관계에 대한 아픈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언제나 그렇듯 어울려 살기의 서투름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역사를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생태계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쉽사리 우울증에 시달리곤 한다. 부재하는 것, 혹은 스러져가는 것을 추억하는 일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우리는 먹는 문제에서부터 우리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 문화를 향유하고 서로 다양하게 접촉하는 모든 관계의 제반 문제에서도 그 우울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가치와 수단을 야합시켜 존재 그 자체의 목적과 동기를 파괴하는 일체의 야만과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시인의 나라에는 시인이 필요 없는 법이다. 모두가 시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달리 시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시인이 아니라 시와 같은 삶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다. 그런 시는 우리의 옷깃을 스치는 바람일 수도 있고 햇빛일 수도 있다. 아니면 천진한 고라니의 눈빛일 수도 있고, 살금살금 기어가는 너구리의 앙증맞은 발걸음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린 한동안 그것의 존재를 잊고 지낼 수도 있고 한없이 그것과 낯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시는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생태계라는 이유로 말이다. 적어도 그 시라는 것이 고속도로 변에 처참하게 팽개쳐진 주검의 모습으로 발견되는 일을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문화 생태계를 가꿔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같은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 평소 가깝게 지내는 연극동지 Y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따라 그의 바리톤 음성이 더욱 차분하게 들려온다. “조 선생님 저 이번에 대학로에다 자그마한 극장을 하나 내게 됐습니다. 오실 거죠?” 아! 여기 또 한 마리의 고라니가 생존 신호를 보내고 있구나. Y형, 부디 건승하시고 두루 자손을 번식하시어 당신의 생존 영역 내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그 날을 보게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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